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케리 그랜트 (문단 편집) == 생애 및 활동 == || {{{#!wiki style="margin:-5px -10px" [[파일:Mother_grant.jpg|width=100%]]}}} || {{{#!wiki style="margin:-5px -10px" [[파일:Father_grant.jpg|width=100%]]}}} || || 어머니 || 아버지 || || {{{#!wiki style="margin:-5px -10px" [[파일:20220920_112929.jpg|width=100%]]}}} || 본명은 아치볼드 앨릭잔더 리치로, 1904년 1월 18일 [[영국]] [[브리스틀]]에서 태어났다. 아버지 일라이어스 제임스 리치[* Elias James Leach. 1872 - 1935.]는 의류 공장에서 압착기를 담당하는 노동자였고 집안은 가난에 시달렸다. 재봉사인 어머니 엘시 머리어 리치[* Elsie Maria Leach. 1877 - 1973.]는 춤, 노래, 피아노를 가르쳐주고 극장에 자주 데려가 영화를 접하게 해준 사람이었지만, 원체 몸이 약했던 형 존이 아기 때 죽은 뒤로 이를 자책하며 [[우울증]]을 앓고 있었고 아치볼드 리치가 9살이 됐을 때 인근 정신병원에 영구 수용되었다. 이때 아버지는 어머니가 피서객이 많이 찾던 해안가 마을인 웨스턴슈퍼메어(Weston-super-Mare)로 혼자 놀러나갔다고 했다가, 곧 죽었다고 속였다. 아치볼드 리치는 1935년 31살이 되어서야 아버지의 사망 직전 고백을 통해 어머니가 살아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돼 재회했다. 이는 평생 [[트라우마]]로 남았다. 늘 불륜을 저지르며 가정을 등한시하던 [[알코올 의존증]]의 '''아버지는 아치볼드 리치가 10살 때 아치볼드를 정신병동의 아내 밑으로 서류상 넘겨놓고 재혼을 하면서 아치볼드를 아예 버려버렸다. 이때 조금이라도 도와준 친척이나 주변 어른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.'''[* 전기 작가들이 계속해서 도움을 줬을만한 주변인들을 찾아보고 있지만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.] 네 번째 아내 다이언 캐넌은 어린 아치볼드 리치가 이 시기에 겪은 일들은 자신이 들어본 부랑아 사연 중 가장 끔찍한 사례라고 말한 적이 있다. 하는 수 없이 비셥 로드 초등학교[* Bishop Road Primary School.]에 다닐 때부터 지역 극장 히퍼드러움(Hippodrome)에서 잡역부로 일하면서 스스로 돈을 벌어야 했다. 그렇게 본의 아니게 학교 수업을 늘 빼먹다가 1918년 14살에 고의로 말썽을 일으켜 장학금까지 받고 입학했던 페어필드 중등학교[* Fairfield Grammar School. 공부를 잘해야 들어갈 수 있었다.]에서 퇴학을 당한 뒤 유랑 희극 극단인 봅 펜더 공연단[* Bob Pender Stage Troupe.]에 들어가게 되었다. 이곳에서 촌극, 곡예 등을 하며 다양한 공연 실력을 다졌다. 심지어 대말(竹馬)[* 이런 묘기다. 자료 사진 속 남자는 그랜트가 아니다.[br][[파일:2f4a294846d71e4dff7f869c263d85e8.jpg]]]도 탔다. || {{{#!wiki style="margin:-5px -10px" [[파일:2da00b6a9f27c55efffd6585fdac8bd6.jpg|width=100%]]}}} || 1920년 이 극단이 2년 짜리 [[미국]] 순회 공연을 하게 됐을 때도 같이 갔다.[* 때문에 한창 윗세대이자 같은 노동 계급 출신인 [[찰리 채플린]]과 유사하게 영화계 진출 커리어를 밟았기 때문에 캐리 그랜트도 [[영국 영화]]랑 별로 연관관계가 없다.] 필요했던 서류들에 아버지 서명을 위조했다는 얘기가 있다. 순회 공연이 끝나고 나서도 [[뉴욕]]에 남아 연기자를 지망하기로 했지만, 캐스팅은 늘 불발됐다. "파커랑 랜드랑 리치"(Parker, Rand, and Leach)란 이름의 삼인조 [[보드빌]] 공연팀을 꾸리는가 하면 주말마다 코니 아일랜드에서 대말 공연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다. '''아치볼드 리치가 이 팀에서 나가면서 1921년에 새로 들어온 멤버가 바로 [[제임스 캐그니]]였다'''. 캐그니가 들어온 뒤로는 이 팀의 이름은 "파커랑 랜드랑 캐그니"(Parker, Rand, and Cagney)가 된다. 1923년부터는 뮤지컬 "Golden Dawn" 등에서 작은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. 1928년 영화사 카메라 테스트 기회를 얻었지만 실패했다. || {{{#!wiki style="margin:-5px -10px" [[파일:2003_CSK_09771_0070_000(070323).jpg|width=100%]]}}} || || "Golden Dawn" (1927-8) || 1931년 연극 "Nikki"의 공연에서 할리우드 스타 [[킹콩(1933)|페이 레이]]의 상대역을 하며 운이 텄다. 이 공연에서 [[할리우드]] 관계자들의 주목을 받았고, 공연이 막을 내린 뒤 [[LA]]로 거처를 옮겼다. [[파라마운트 픽처스]]와 5년 계약을 맺었다. 주급은 450 달러였다. 본명인 영국 이름 아치볼드 리치 대신 [[게리 쿠퍼]]처럼 미국적으로 들리는 이름이 필요하다는 파라마운트의 요구에 예명을 지었다. '캐리(Cary)'는 자신을 영화계에 데뷔할 수 있게 해준 연극 "Nikki"에서 연기했던 인물의 이름인 캐리 락우드(Cary Lockwood)에서 따온 것이었고, '그랜트(Grant)'는 회사에서 지정해서 제시한 성 가운데서 골랐다. 이렇게 '캐리 그랜트'가 된 아치볼드 리치는 1932년 데뷔작 <디스 이즈 더 나이트>부터 호평 받았지만 <마담 버터플라이>(1932), <금발의 비너스>(1932)에 이르기까지 흥행작은 없었다. (1932)을 찍던 중 촬영장에서 랜덜프 스캇[* Randolph Scott. 감독 버드 베티커와 제작자 해리 조 브라운, 각본가 버트 케네디 조합의 래나운 서부극으로 유명한 배우다.]을 만나 동거인이 되었고 그 뒤 12년 간 같이 살았다.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cary_Madame_Butterfly1.jpg|width=100%]]}}}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cary_Madame_Butterfly3.jpg|width=100%]]}}} || ||<-2> <마담 버터플라이> (1932) || 스타 [[메이 웨스트]]의 눈에 들어 웨스트와 함께 하게 된 첫 메이저 영화 주연작 <다이아몬드 릴>은 메가히트작으로, 파산 위기였던 [[파라마운트 픽처스]]를 구원해주었다. 그 다음에 또 같이 출연한 <나는 천사가 아니다>(1933)는 아예 [[메이 웨스트]]가 대본까지 직접 쓴 작품이었다. || {{{#!wiki style="margin:-5px -10px" [[파일:20220920_114955.jpg|width=100%]]}}} || || <나는 천사가 아니다> (1933) || || {{{#!wiki style="margin:-5px -10px" [[파일:20220920_124949.jpg|width=100%]]}}} || || (1934) || (1934) 등의 작품을 거쳐, 그랜트는 1935년 어느새 주급 3,500달러의 대우를 받게 됐음에도 [[파라마운트]]와 갈라서게 된다. 이유는 [[MGM]]으로 자신을 대여해 <[[바운티호의 반란(영화)#s-2.3|바운티호의 반란]]>(1935)에 출연하게 도와달라는 요구를 파라마운트에서 거절했기 때문이었다. 그랜트의 예상대로 해당 영화는 [[아카데미 시상식]]을 휩쓸었다. 그렇다고 다른 영화사를 찾지도 않았고, 에이전트를 통한 영화 건당 계약이라는 당시로서는 큰 모험을 하게 되었다. 제작사와 다년 짜리 계약에 묶여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절이었고, 이전 시도자들은 모두 실패했던 길이었다.[* 대표적인 저항자로는 [[베티 데이비스]]와 [[올리비아 드 하빌랜드|올리비어 더 해빌런드]]가 있다. 더 해빌런드도 그랜트의 시도 8년 후인 1943년에야 소송을 시도했을 정도로 제작사 계약의 효력이 강력했던 시절이었다.] 그랜트도 초반엔 꼭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. [[캐서린 헵번]]이 나온 [[RKO]]의 <실비어 스칼럿>(1935) 주역을 따냈지만 영화는 흥행을 망쳤다. [[진 할로우]]와 나온 (1936) 등 그 뒤에 바로 이어진 다섯 작품들도 작품성이 변변찮았고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. 그러나 1937년 [[MGM]]의 <타퍼>의 성공으로 기사회생하면서부터 그랜트는 곧 남들과 달리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개체로 살아남을 수 있는 그만의 경쟁력을 증명했다. 이후 10여년간 그랜트는 스타로서의 명성을 눈부시게 쌓아나간다. 그랜트는 영화 수익의 10%를 받는 계약을 협상한 최초의 할리우드 배우이기도 하다. || {{{#!wiki style="margin:-5px -10px" [[파일:roland-young-cary-grant-and-constance-bennett-in-a-scene-news-photo-1590091044.jpg|width=100%]]}}} || || <타퍼> (1937) || 속사포같이 내뱉는 말솜씨와 신사다운 목소리, 빼어난 외모, 매력적인 옷차림 때문에 곧바로 스타가 되었고,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젊은 시절에는 스크루볼 코미디에서 크게 두각을 보였다. 이 시기의 그랜트는 주로 뻔뻔해도 미워할 수 없는 바람둥이로 묘사되는데, 본격적인 시작은 [[아이린 던]]과 나온 <이혼 소동>(1937)이다. 부부가 각자 상대방이 바람을 폈다고 의심하며 이혼한 뒤 서로의 재혼을 방해하려고 애쓰는 내용이었다. 이 영화를 통해 그랜트는 감독 [[리오 맥캐리]]를 만났는데, 맥캐리의 세련된 패션, 행동거지, 말투를 면밀히 관찰해 모범으로 삼으면서 특유의 스타일을 완성했다. [[캐서린 헵번]]과 [[배리 피츠제럴드]] 그리고 니서(Nissa)라는 이름의 표범이 나오는 <베이비 길들이기>(1938), 제멋대로인 상속녀 [[캐서린 헵번]]의 첫 번째 남편으로 나와 현 약혼자는 물론 새롭게 등장한 기자 [[제임스 스튜어트]]와 헵번의 마음을 얻기 위해 경쟁하는 <[[필라델피아 스토리]]>(1940), 능력있는 기자인 여주인공의 신문편집자 전 남편으로 나와 아웅다웅하는 <연인 프라이데이>(1940) 등도 대표적이다. [[하워드 혹스]], [[조지 큐코어]] 등 내로라하는 거장들이 이러한 이미지를 부각시킬 수 있는 역할로 그랜트를 기용했다. 한편 40년대부터 [[앨프리드 히치콕]]은 <의혹>(1941)을 시작으로 그랜트의 내면에 숨어 있는 어둡고 속을 알기 힘든 모습에 초점을 맞췄다. [[제2차 세계 대전]]을 배경으로 나치를 때려잡으려는 정부 요원 그랜트를 돕기 위해 [[잉그리드 버그먼]]이 잠입하는 내용의 <[[오명(영화)|오명]]>(1946)은 그 중 걸작으로 손꼽힌다. 그 외에 <나는 결백하다>(1955), <[[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]]>(1959)가 있다. || {{{#!wiki style="margin:-5px -10px" [[파일:grace-kelly-and-cary-grant-kissing-in-the-front-seat-of-a-news-photo-1590091434.jpg|width=100%]]}}} || || <나는 결백하다> (1955) || [[007 시리즈]] 원작자 [[이언 플레밍]]은 [[로맨틱 코미디]]와 [[앨프리드 히치콕]] 감독의 [[서스펜스]]물 모두에 능한 그랜트가 1대 007이 되어주길 바랬지만 그랜트는 시리즈 1편 <[[살인번호]]>가 제작된 [[1961년]] 이미 57살[* 우연하게 [[로저 무어]]가 역대 최고령으로 본드 역을 은퇴할 때 나이와 같다.]이어서 이 제안을 거절했다. 그랜트는 나이를 고려해 한 편만 계약하고 싶어했고, 제작사는 시리즈로 계약하고 싶어해서 서로 뜻이 맞지 않았다. 대신 이 취향의 영향으로 [[제임스 본드]]는 그랜트 이미지처럼 키 180 중반 이상의 미남 배우를 쓰는 게 한동안 원칙이었다. 60년대에 들어서도 [[도리스 데이]]와 <댓 터치 오브 밍크>(1962) 같은 로맨틱 코미디물을 찍기도 했으며, 1966년 <뛰지 말고 걸어라>로 은퇴할 때까지 슬럼프 없이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. 그러나 상복은 없어서 <페니 세러네이드>(1941)와 <논 벗 더 론리 하트>(1944)로 [[아카데미 남우주연상]] 후보에 올랐지만 무관에 그쳤다. 그랜트는 자신의 연기가 외모 때문에 지나치게 저평가 받는다며 언론에 직접적으로 불만을 토로했고, 경력 내내 이를 고통스러워했다. || {{{#!wiki style="margin:-5px -10px" [[파일:cary-grant-and-irene-dunne-in-a-scene-from-the-film-penny-news-photo-1590091920.jpg|width=100%]]}}} || || <페니 세러네이드> (1941) || 1966년 딸이 태어난 후 딸의 양육에 집중하기 위해 은퇴에 들어갔다. 이후 그랜트를 다시 영화계로 불러내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지만 전부 거절 당했다. 1986년 [[뇌졸중]]으로 인한 사망 후 유언에 따라 장례식이 생략되었다. 유해의 행방에 대해선 명확히 공개된 적이 없다. 화장 후 [[캘리포니아주]]의 한 언덕에서 재를 흩뿌렸다는 추측이 있을 뿐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